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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규의 재평가가 이루어져야...

기사승인 2019.12.12  13:1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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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구선생을 살해한 안두희를 처단한 박기서를 일부에서는 의사라고 부르기도 한다.

안두희는 박기서의 ‘정의봉’에 죽었지만 그 이전부터 안두희를 처단하기 위한 시도는 여러 차례 있었다.

1961년 ‘백범살해 진상 투쟁위원회’간사였던 김용희는 안두희를 붙잡아 사건의 전말을 녹취한 뒤 검찰에 넘겼으나 공소시효가 지나 처벌할 수 없었다.

1965년 김제 출신 곽태영이 안두희를 찾아내 목을 찌르는 중상을 입혔지만 극적으로 살아났다. 10년 넘게 안두희를 추적했던 '민족정기구현회' 권중희 회장은 1987년 그를 찾아내 김창룡의 사주를 받고 김구 선생을 암살했다는 자백을 받아냈다. 그는 안두희를 폭행한 일로 입건되기도 했다.

그리고 1996년 10월 23일 버스기사였던 박기서 씨에 의해 마침내 응징되었다. 안두희는 법이 아닌 정의가 단죄한 것이다.

박기서씨는 5년형을 선고받았으나 사면을 받아 1년 3개월 만에 출소했다.

#2

1979년10월 26일 궁정동 안가에서 박정희가 피살되었다. 박정희를 살해한 김재규는 “민주 회복을 위해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라고 일관된 주장을 했다.

그의 주장은 신군부에 의해 묵살되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을 따랐던 박홍주, 박선호, 이기주, 유성옥, 김태원 등과 함께 내란죄로 사형을 당했다. 끝까지 자신의 부하들을 살리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신군부는 김재규의 권력에 의한 탐욕에서 대통령을 살해했다고 하지만 당시 변호를 맡았던 변호인들은 그런 느낌을 받지 못했다고 말하고 있다.

신군부는 그를 살려둘 수가 없었다. 정권찬탈에 그는 걸림돌이었다. 김재규의 행위가 김재규가 주장한 것처럼 유신을 종식시키기 위한 충정으로 인정하면 김재규는 전혀 다른 위치에 올라갈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내란죄를 적용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분명한 것은 비록 이후 신군부가 다시 활개를 쳤지만 이 나라의 민주화를 앞당기게 만든 것은 사실이다.

민족의 지도자를 암살한 안두희를 죽인 것이나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던 김재규의 행위는 현행법상 살인이 분명하다. 목적이 정당하다고 해서 살인의 행위를 정당화할 수는 없다.

그러나 안중근 의사의 의거도 우리 내부에서조차 테러리스트로 규정하는 세력이 있지만 국민으로부터 추앙을 받고 있다. 물론 격이 다르다는 주장도 있을 수 있지만 박기서나 김재규 그리고 안중근은 대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 점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따라서 박기서가 사면을 받았던 것처럼 김재규와 그의 부하들 역시 재평가가 이루어져야 마땅할 것이다. 우리 역사에서 당시는 역적으로 몰렸으나 훗날 신원이 회복된 사례는 무수히 많다.

 

 

 

심춘보 a25750@naver.com

<저작권자 © 다산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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