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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석의 역사 이야기

기사승인 2019.07.19  13:4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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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명애 (1886년 ~ 1938년)

임명애(林明愛)는 경기도 파주군 와석면 교하리(현 교하면 교하동) 출신 독립운동가로 독실한 기독교 구세군 신자였다.
임명애는 같은 동네에 살던 다섯 살 많은 염규호(廉圭浩)와 늦은 결혼을 하고 교하리에 가정을 꾸렸다.

1919년 3월 1일 12시 서울 탑골공원에서 수천 명의 군중이 모인 가운데 독립선언서가 낭독되고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서울 시내에서 평화적인 만세운동이 펼쳐지자 만세운동은 전국으로 확대되기 시작하였다.

1919년 3월 10일 경기도 파주군 와석면 교하리에 있는 교하공립보통학교(현 교하초등학교) 운동장에서 교하공립보통학교 학생 백여명이 모인가운데 임명애는 ''조선독립만세" 를 외치면서 파주군에서도 만세시위가 펼쳐지기 시작했다.
3월 25일 16살 교하공립보통학교 학생 김수덕(金守德)과 24살 농민 김선명(金善明), 농민 김창실(金昌實)등이 임신 3개월인 임명애와 염규호의 신혼집에 찾아와서 와석면에서도 만세시위를 하자는 계획을 세웠다.

임명애의 집에 모인 사람들은 만세시위를 하기로 하고 많은 면민들을 동참시키기 위해서 ''3월 28일 만세운동에 적극 참여하라, 참여하지 않는 자의 집에는 방화를 할 것이다"라는 격문을 구세군 교인인 임명애의 남편 염규호가 원고를 작성하고 구세군 교인인 김수덕이 교회에서 등사판과 종이를 가져와서 격문 60장을 인쇄했다. 

격문 60장을 인쇄한 임명애, 염규호, 김선명, 김창실, 김순덕 등은 작성한 격문을 나누어서 구당리와 당하리 일대의 구장들에게 격문을 배포하고 많은 사람들을 모으라고 당부를 했다.
3월 28일 날이 밝자 남녀노소 700여 명이 모이고 최홍주, 임명애, 임명애의 남편 염규호등은 그들을  인솔하여 와석면 사무소 앞마당에 도착하고 독립만세를 외쳤다.
그리고 몽둥이와 돌로 와석면사무소 유리창을 깨뜨리고 출입문을 파괴하고 면서기들을 끌어내자 결국 와석 면장은 만세를 함께 부르고 시위 군중들의 자진 해산을 촉구하였으나 시위대는 해산하지 않고 ''조선독립만세" 를 외치면서 일본 경찰의 와석면 주재소로 향했다.

시위 군중들이 일본 주재소 앞에 도착하자 시위 군중은 1천500여 명으로 늘어나고 시위 군중들은 ''조선독립만세"를 계속해서 외쳤다.
그러자 일본 경찰은 총을 쏘면서 무력으로 시위대를 강제로 해산시키면서 선두에서 시위를 이끌던 최홍주가 일경이 쏘는 총탄에 맞아서 그 자리에서 숨졌다.

그날 홀몸이 아닌 임경애는 남편 염규호와 함께 주모자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고 그해 재판을 받은 임경애는 치안을 방해한 보안법 혐의와 관청의 허가를 얻지 않고  볼온 문서를 인쇄하고 배포한 출판법 위반 혐의의 주범으로 징역 1년 6개월의 형을 선고받았다.
남편 염규호와 김수덕, 김선명에게는 각각 징역 1년형을 구형하였다.

임명애는 그해 6월 3일 서대문 형무소에 투옥되었다.
만삭의 몸으로 서대문 형무소에 투옥된 임명애는 서대문 형무소 여감방인 8호 감방에 투옥되고 거기서 여성 독립투사 유관순(이화학당 고등부 1학년 학생 17살), 신관빈(호수돈여자고등교 사감 선생 34살), 어윤희(기독교 전도사 39살), 심영식(세례명 심명철 전도사 23살), 권애라(교사 겸 선교사 22살), 김향화(본명 김순이 수원 출신 기생 22살) 등을 만났다.
만삭의 몸으로 여감방 8호실에 수감된 임명애는 형무소에서 주는 쌀 한 톨 썩이지 않은 보리 죽이나 콩을 섞은 보리밥에  소금에 절인 무 몇 조각으로는 양도 적고 영양도 턱없이 부족했다.

서대문 형무소 여감방 8호실에 수감된 여성 독립운동가들은 형무소에서 주는 몇 숟가락의 끼니로는 태아가 정상적으로 성장할 수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임명애에게 밥 한 숟가락이라도 더 먹이기 위해서 각자 임명애에게 밥을 한 숟가락씩 덜어주자 임명애는 자신들이 먹기에도 부족한 밥을 받기에 부담을 느끼고 거부하자 유관순, 신관빈, 어윤희, 심명철, 권애라, 김향화 등은 누가 먼저라고 할 수도 없이 임명애가 미안해 하지 않게 끼니때마다 돌아가면서 배탈이 났네, 소화가 안되네, 입맛이 없네, 등의 핑계를 대고는 밥을 먹지 않고 임명애에게 양보했다.

임명애는 한 달 후인 7월 출산을 위해서 임시로 출소했다가 그해 9월 29일 갓난아기와 함께 서대문 형무소 여감방 8호실에 재수감되었다.
1921년 4월 만기 출소한 임명애는 남편 염규호와 함께 파주 지역의 농촌개몽운동을 하였고, 남편 염규호는 구세군 정교를 임명애는 부교로 활동하다가 임명애는 1938년 8월 28일 52세로 와석면 교하리에서 졸하셨다.
남편 염규호는 1941년 3월 9일 고향 파주군 와석면 교하리에서 졸하셨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2년 임명애의 공훈을 기리며 대통령표창을 수여하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이상석 webmaster@dasanjournal.co.kr

<저작권자 © 다산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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