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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석의 역사 이야기

기사승인 2019.07.13  19:5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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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향화(1897년 ~ ?)

김순이(金順伊)는 일제강점기 때의 기생이며 독립운동가로 기명(妓名)은 김향화(金香花) 또는 김행화(金杏花)라고 하는데 김순이의 본관과 가계에 대해서는 전하는 것이 없다.
그녀의 부모와 그녀의 어릴 때 행적 또한 알 수가 없고 1897년 7월 16일 한양에서 태어났다는 사실만 전해진다.

1913년 17살 때 수원에 살던 정도성과 결혼하고 수원에서 살다가 1914년 정도성과 이혼하고 동생과 함께 수원 남수리에 살았다.
이혼을 하고 동생하고 함께 살던 김양화는 가난한 가정형편으로 기생이 되고 수원 기생조합의 기생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김향화는 검무와 승무를 잘 추고 가야금 연주를 잘하는 보기 드문 기생이 되고 기생조합의 대표 기생이 되었다.

1919년 1월 21일 대한제국의 고종 황제가 승하하자 1월 27일 대표 기생 김양화가 주축이 되어서 동료 기생 20여 명과 함께 소복에 나무 비녀를 꽂고 짚신을 신고 수원에서 기차를 타고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곡을 하고 귀가하였다.

1919년 3월 1일 오후 3시 민족 대표 29명이 경성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일경에 연락해서 구금된  상태에서 독립 만세운동은 전국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3월 29일 경기도 수원군 화성행궁 앞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화성별궁 안에 있는 자혜병원에서 위생 검진을 하고 돌아가던 김향화의 주동으로 동료 기생 30명은  만세운동에 동참하였다.
화성별궁 앞에서 만세운동에 참여하고 귀가하던 도중에 김양화의 주도로 수원군 경찰서 앞에서 또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징역 8개월을 언도받았다.

김향화는 서대문형무소 여감방 8호실에 수감되고 여성 독립운동가 유관순, 임명애, 신관빈, 어윤희, 심명철, 권애라와 함께 수감되었다.
이들 7명과 함께 수감 생활을 하던 임명애는 수감 당시에 만삭의 몸이었는데 남편 염규호와 함께 고향인 경기도 파주군 와석면 교하리에서 만세운동을 하다가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었다.
만삭인 임명애는 형무소에서 지급하는 식사로는 태아에게 영양공급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함께 수감 생활을 하던 6명은 만삭인 임명애에게 밥을 더 먹이기 위해서  끼니 때마다 돌아가면서 배탈이 났네, 소화가 안되네, 밥맛이 없네, 하는 핑계를 대고는 자신도 배가 고픈데 자신들의 밥을 만삭인 임명애에게 먹였다.

6월 3일 여감방 8호실에 들어온 임명애는 한 달 후인 7월 중순에 출산을 위해서 임시로 출소했다가 그해 9월 29일 갓난아기와 함께 서대문 형무소 여감방 8호실에 재수감되고 김향화는 그해 10월 27일 가출옥하였다.
서대문 형무소 여감방 8호실에 수감된 7명은 옥고를 치르는 두려움을 이기기 위해서 김향화는 그들에게 창가를 가르쳐 주고 7명이 함께 부르며 두려움을 이겨 나갔는데 여감방 8호실에서 하도 노래를 부르자 간수들이 시끄럽다고 제지하기도 하였다.
또 8호실에 함께 수감되었던 심명철은 스스로 작사 작곡을 해서 함께 노래를 부르기도 했는데 당시  8호실 감방에서 심명철이  작곡한 노래 2수가 지금도 전해진다.

                   선죽교 피다리
                                             심명철


진중이 일곱이 진흙색 일복 입고
두 무릎 꿇고 앉아 주님께 기도할 때
접시 두 개 콩밥 덩이 창문 열고 던져줄 때
피눈물로 기도했네 피눈물로 기도했네

                  대한이 살았다.
                                              심명철

대한이 살았다.
대한이 살았다.
산천이 통하고 바다가 끓는다.
에헤이 데헤이 에헤이 데헤이
대한이 살았다.
대한이 살았다.

김향화는 그들에게 노래를 가르쳐 주다가 1919년 10월 27일 가출옥하였다.
서대문 형무소에서 출옥한 김향화는 수원에서 계속 살다가 1934년 이름을 김우순(金祐純)으로 개명하고 그가 살던 수원읍 남수리 201번지에서 종적을 감춘후에 행방불명되고 그 후로 그녀의 행적은 밝혀진 것이 없다.
수원시는 그녀의 얼굴을 동판으로 새겨서 수원시청 현관에 수원을 빛낸 위인으로 걸어놓았다.

2009년 수원 박물관에서 김향화를  독립유공자로 선정해줄 것을 보훈처에 포상 신청을 하자 그해 국가보훈처는 김양화에게 독립운동 대통령 표창을 추서했다.
 


다산저널 webmaster@dasanjourna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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